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러시아-아제르바이잔 관계 (문단 편집) === 20세기 === [[1905년 러시아 혁명|1905년]]이 되면 크림 타타르족 출신 [[이슬람 모더니즘]] 사상가 이스마일 가스프랄르의 영향을 받은 신식 이슬람 학교들이 바쿠를 중심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이스마일 가스피랄리는 [[범튀르크주의]]를 기반으로 이슬람의 현대화를 주장하던 사람으로, [[부하라]]의 재래식 [[마드라사]]들을 무지몽매하고 낙후된 무슬림 사회를 대표하는 적폐로 묘사함과 동시에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립카 타타르]] 커뮤니티를 이슬람계가 본받아야 할 모범적인 사례로 추켜세웠다. 시아파 이슬람 세계에 속해있었던 바쿠의 지식인들은 같은 시아파인 이란의 전통적인 농촌 마드라사들을 '무지몽매하고 낙후된' 무슬림 사회의 전형으로 보게 되고, 대신 러시아를 통해 수입된 서구식 민족주의나 범튀르크주의의 열광하게 되었다. 이는 독립 이후 아제르바이잔이 이란과 거리를 두고 순니파 이슬람이 우세한 [[튀르키예]]와 친교 관계를 강화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19세기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아제르바이잔의 여러 이슬람 칸국들은 종파 문제 때문에 오스만 제국과 잦은 전쟁을 치루던 적대관계였었다.] 1918년에 러시아 제국이 [[러시아 혁명|혁명]]으로 멸망하고 [[소련]]이 출범한 뒤에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았던 아제르바이잔 지역은 [[자캅카스 민주 연방 공화국]]이 되었다. 자캅카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은 소련에 병합되어 아제르바이잔 지역은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되었다. 이미 바쿠에는 1904년부로 [[볼셰비키]] 조직이 자생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일찍이 바쿠 유전에서 근로하는 산업노동자 계급이 형성되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소비에트 정권은 1926년 바쿠에서 개최된 튀르크어학 대회에서 [[아제르바이잔어]]에서 [[페르시아 문자]] 사용을 금지하고,[[라틴 문자]]로 표기하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해당 조치로 인해 아제르바이잔인들이 터키와 지나치게 가까워지며 [[러시아어]] 습득에 열의를 보이지 않자, 다시 소비에트 정권은 1939년부로 아제르바이잔어를 [[키릴 문자]]로 표기하도록 방침을 변경하였다. 모든 강제 가맹국들이 그랬듯이 아제르바이잔도 민족주의자들, 지식인이 엄청나게 학살당했다. 소련의 일부가 된 후 [[이오시프 스탈린|스탈린]] 시절에는 5만 명이 넘는 아제리인들이 학살당했는데 그중에는 이슬람 성직자도 상당히 많았다고 한다. [[남아제르바이잔]]도 소련의 영향을 받았다. 20세기 초~중반에는 소련은 아제르바이잔을 지배하면서 남아제르바이잔에도 잠시 소련의 위성국([[길란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 등)을 세웠지만, 이후에 철수했다. 레닌 시대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에서는 [[이오시프 스탈린]]이 아제르바이잔의 편을 들어주어 [[나흐츠반]]과 [[나고르노카라바흐]]를 아제르바이잔의 영토로 귀속시켰다. 반대로 1988년 숨가이트 학살 당시에는 [[미하일 고르바초프]] 정권이 아르메니아 편을 들어주었다. 당시 [[미하일 고르바초프|고르바초프]] 정권이 아르메니아 편을 들어주고 카살리 학살에서 지원하던 점으로 급격한 반러시아 붐이 일어나 미국을 지지하는 여론이 커졌지만 위에 나오듯이 미국이야말로 더 노골적으로 아르메니아를 편들었기에 친서구정책을 취하던 민주정부가 무너지고 [[헤이다르 알리예프]] 정권이 집권하면서 친러 정책으로 돌아섰다. 다른 한편으로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공용어는 [[러시아어]] 민족자치어는 [[아제르바이잔어]]였고, 공교육은 러시아어와 아제르바이잔어로 이루어졌다.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시대를 거치며 아제르바이잔 내 [[타트인]]이나 [[탈리시인]] 같은 소수민족 집단은 모어인 타트어 등으로는 글을 읽고 쓸 줄은 모르지만 러시아어로는 글을 자유자재로 읽고 쓰게 된다든지 아니면 농촌에서 도시로 이사한 후에 러시아어만 사용하게 된다든지 같은 이유로 세대가 지나면서 점차 모어를 잊어버리고, 아제르바이잔인으로 동화되기 이르렀다. 러시아 제국 시대 [[바쿠]] 일대의 유전 지대가 개발되었던 영향으로 아제르바이잔이 소련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한 편이었다.[* 밀덕득 사이에서는 [[독소전쟁]] 당시 히틀러가 바쿠의 유전지대를 탐내서 독일군에게 캅카스 방향으로 남하를 지시했다가, 결국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패전하여 후퇴한 사례가 유명하다.] 당시 적지 않은 러시아인 석유 화학 기술자들이 아제르바이잔 일대에 체류하였었으나, 소련 해체 이후에는 대부분 러시아 등으로 돌아가버리고 오늘날 아제르바이잔에 잔류한 러시아인들은 대개 19세기 초 아제르바이잔으로 이주해온 몰로칸파의 후손이라서 러시아에 돌아갈 연고지가 없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소련 해체 이후 독립한 아제르바이잔은 아제르바이잔어의 표기를 [[키릴 문자]]에서 [[로마자]]로 다시 바꿨고[* 1930년대 잠시 로마자로 표기하던 시절도 있었다.] [[러시아어]]를 공용어에서 배제했다.[* 러시아어를 배제하면서 아제르바이잔내 러시아인들이 대부분 러시아로 이주했다.] [[간자]]의 경우 러시아 제국 시절 옐리쟈베트폴, 소련 시대 키로바바트로 불렸던 도시였으나 독립 이후 아제르바이잔어 명칭인 [[간자]]로 환원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